3월 25일 화 / 강사: 김수환
(이전 포스트에 이은 두번째 강의록입니다.)
수환: 자, 그럼 이제 도대체 “푼크툼”이 뭔지 하나씩 짚어가면서 따져보겠습니다. 롤랑 바르트는 프랑스의 기호학자이고 저렇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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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문학비평가로 출발을 했고. 대표적인 기호학자 중의 한 분이죠. 80년에 사망했고요. “카메라 루시다”라는 제목은 원제가 아니에요. 원제는 “밝은 방”이라는 제목인데 한국에서는 영문판을 번역하면서 “카메라 루시다”가 되었죠. 이번에 새로 프랑스어 원문을 번역한 책이 나왔는데 더 좋지 않더라구요. 열화당의 중역이 더 좋아요. 이 책은 바르트가 죽기 전에 쓴 마지막 책입니다. 바르트는 80년에 죽었는데 세탁물 배달하는 차에 치여 죽었어요. 좀 어이없는 죽음인데 일부러 그랬나 싶기도 하고. 어쨌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호학자입니다. 60년대에 “오늘날의 신화”라는 문학비평 책으로 데뷔를 해서 이십 년 넘게 문화비평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문학으로 시작해서 사진으로 끝냈죠. 많은 개념들을 만들어냈는데 그 중 “스투디움”과 “푼크툼”에 대해서 다루겠습니다.
이 책에서 바르트는 “스투디움으로서의 사진”이 있고 “푼크툼으로서의 사진”이 있다고 말하고 있죠.
바르트: 내가 이 사진들에 대해 느끼는 것은 거의 길들이기에 가까운 ‘평균’ 감정 상태에 속한다. (중략) 거기에는 열심이기는 하지만, 특정한 격렬함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p31)
수환: 이런 구절에서 우리는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특징을 추출할 수 있어요. 적당한 절제와 교양이 있는 게 스투디움이라면 푼크툼은 흘러 넘치는 거. 과잉. 향락. 이런 거다. 오버하는 거죠.
바르트: (스투디움이라는 말에는 문화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두 번째 요소는 스투디움을 깨뜨리기 위해 (혹은 스투디움과 박자를 맞추려고) 온다. (p32)
수환: 푼크툼은 라틴어로는 점이라는 뜻이죠.
바르트: 그것 스스로가 마치 화살처럼 사건의 현장을 떠나 나를 꿰뚫기 위해서 온다. (p32)
수환: 사진으로부터 뭔가가 화살처럼 날아와서 점이 돼서 날 찌르는 거.
바르트: 사진의 푼크툼은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 우연이다. (p32)
수환: 원어로 하면 accident에요. 사건. 사진을 본다는 건 나의 시선을 사진 쪽으로 보내는 거죠. 하지만 푼크툼은 사진으로부터 뭔가가 나와서 나를 찌르는 거. 그게 푼크툼이에요. 게다가 바르트는 뭐래요? 그게 날 상처 입히고 주먹으로 때린대요. 여러분은 이런 경험 해본 적 있어요?
오드리: 영화나 사진이나 그런 걸 봤을 때 직접적으로 다가온 경험..
수환: 그건 느낌의 차원이고 그렇다면 뭐가 날 찔렀을까 생각해봐야겠죠. 추측을 해봐야겠죠. 또 문제는 그게 정말 푼크툼인가? 생각해봐야겠죠. 그게 스투디움일 수도 있거든? 생각해보는 방법은? 하나씩 소거해보는 거야. 그러고 나면 남는 게 푼크툼일지도 몰라요. 고전적인 소나타처럼 스투디움과 푼크툼은 함께 오는 거에요. 내가 그걸 구분할 수 있을까? 스투디움은 호감을 갖는 것이고 푼크툼은 사랑하는 거에요. 그 둘에 어떤 차이가 있어요? 호감을 가진다고 우리가 그렇게 아프거나 괴롭진 않죠. 하지만 사랑을 하면 괴로워집니다.
바르트: (중략) 막연하고 매끈한, 무책임한 흥미와도 같은 것이다. (중략) 스투디움을 알아본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사진가의 의도와 마주침을 의미한다. (중략)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과 소비하는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하나의 계약이기 때문이다. (p33)
수환: 계약이 뭐죠? 약속이죠. 사회적 관례입니다. 랑그. 대표적으로 광고죠.
바르트: 그리고 나는 구경꾼으로서 다소의 기쁨을 느끼며 그들을 알아본다. (p33)
수환: 다소의 기쁨, 나 이거 해석했어. 알아들었어. 하면서 알아보는 거죠. 하지만 바르트는 그것은 결코 쾌락이나 고통은 아니라는 거에요.
바르트: 사진은 (중략) ‘세부들’을 단번에 보여준다. 즉, 일부 대상물의 수집을 가능하게 하고, 내 속에 잠재하고 있는 물신숭배를 만족시켜 준다. (p35)
수환: 여러분. 우리는 사진이 내 속에 잠재하고 있는 물신숭배를 만족시켜 준다는 거에 십분 동의할 수 있습니다. 주로 싸이월드를 광적으로 하는 친구들. 내가 있었던, 심지어는 내가 없었던 모든 장소에 대한 사진을 수집합니다.
바르트: 나에게는 지식을 사랑하고, 지식에 대해 연애 감정을 느끼는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p35)
수환: 이런 건 다 스투디움이란 얘기죠. 발터 벤야민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책을 썼는데. 20세기 초반의 책인데도 그때 이미 그런 얘기를 했어요. 사람들은 사진을 통해서 사물을 자기 곁에 가까이 두려는 욕망을 보이고 있다. 그로부터 일세기가 지난 오늘 날 우리는 그것이 더 강화된 삶을 살고 있죠.
자 이제 이 책의 14번에 이르면, 사진은 충격을 준대요. 쇼크. 이것을 주는 데에 몇 가지 방식이 있어요. 첫 번째는 어떤 진귀함이 감탄시킨다는 거죠. 여러분들, 진귀한 사진들 많이 알죠? 엽기 사진. 쉽게 볼 수 없는. 근데 이런 것도 다 스투디움이에요. 푼크툼이 아니야. 두 번째는? 동작의 순간을 재현하는 것. 결정적인 순간을 탁 담아내는 거. 유명한 사진작가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 그 사람의 캐치프레이즈가 “결정적 순간”이에요. 사진이 포착한 결정적 순간. 하지만 바르트 생각에는 이것도 다 스투디움이라는 거죠. 좀 더 광학적인 측면에서 생각하자면 서울우유의 왕관. 스펀지의 고속촬영. 혹은 극도의 광학렌즈로 본 미세한 세계. 이것도 다 스투디움이라는 거죠. 그것이 네 번째 놀라움이에요. 다섯 번째 유형은 의외의 것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 그냥 노출을 시켜놨는데 어떤 사람이 옥상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포착됐다든지 하는 것이죠. 그러다가 책의 마지막 줄을 보면. “초기에 ‘사진’은, 놀라움을 주기 위하여, 눈에 띄는 것을 촬영하였다.”라는 표현이 나오죠. 그러다 나중에는 너무나 하찮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찍기도 하죠. 일상적인 세부들. "으젠느 앗제”라는 20세기 초반의 사진작가가 주로 이런 작업을 했어요. 파리의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버려진 구석 같은 것들을 찍었죠. 바르트는 그 모든 것들도 다 스투디움이라고 보는 거죠. 푼크툼이 아니에요.
계속해서 바르트는 비판적인, 하지만 정말 사회를 비판하기엔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사진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마지막 문장, “결국 사진은, 두려움을 주거나 찡그리거나 비난할 때가 아니라 생각에 잠길 때, 파괴적이란 특성을 갖는다.” 뭔 소리야? 우리가 사진을 보고 생각에 잠기게 될 때 파괴력을 갖는다는 거에요.
16번에 가면 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어요. 이것도 비유인데, 내가 어떤 사진을 보고, 거기에 가서 살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사진과 방문해보고 싶다는 사진이 있대요. 물론 방문하고 싶게 하는 사진은 스투디움이겠죠.
바르트는 스투디움 사진의 대표적인 예로 두 가지를 들고 있어요. 하나는 보도사진. 보도사진에는 충격은 있고 혼란은 없다. 푼크툼이 없다. 두 번째는 포르노 사진이라고 하죠.
스투디움 사진의 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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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우리는 이런 사진들을 이미 사진 책 속에서 다 배워요. 이미 우리는 어떤 관례 속에서 출발하고 있는 거죠. 흥미롭지만. 곧 지루해진다. 내가 어떤 걸 보고 흥분하는 거 자체가 관례화되어 있어요.
바르트: 마플레토르프는 아주 가까이에서 그물로 짠 수영팬티를 촬영함으로써, 성에 대한 그의 거창한 계획을 포르노에서 성애로 이동시킨다. 이 사진이 단일성을 갖지 않는 이유는 내가 옷감의 결에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p45)
수환: 결. 우리가 사진을 보자마자 의도를 알아챌 수 있어야 하는데 어떤 때 엉뚱한 것에 집중하게 되요. 푼크툼의 자질 중의 하나죠. 결을 살피게 되는 것.
나르샤: 이건 푼크툼은 아닌 것 같은데요, 티벳 사진에서
수환: 물론 그걸 처음 발견한 애가 있었지요. 사회적 의미가 충분한 티벳 사진에서 엉뚱한
바르트: 늘 단일한 사진의 공간에서, 때로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참으로 드물게) 하나의 ‘하찮은 것’이 나를 끌어당긴다. (중략) 이 ‘하찮은 것’이 바로 (나를 찌르는) 푼크툼이다. 스투디움과 푼크툼 (이들이 사진에 있을 때) 사이에 결합의 규칙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의 공존이고, 이것이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이다.
수환: 규칙을 세울 수가 없대. 이렇게까지 무책임할 순 없잖아. 그래도 학잔데. 그래서 바르트는 푼크툼 사진의 예를 들고 있어요.
책에 나온 가족 사진. 흑인 가족의 초상. 우리가 1926년의 흑인가족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이 사진의 문화적 의미를 읽을 수 있죠. 근데 바르트는 이 사진을 보고 그런 건 다 생각 않고 엉뚱하게 이 유모의 끈 달린 구두가 날 끌었다고 해요. 그래서 푼크툼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푼크툼이 아니야. 그렇다면 다음 시간 숙제는 뻔할 뻔자죠. 여러분의 푼크툼을 찾아오는 거죠.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거겠죠.
바르트: 푼크툼의 또 다른 확장의 예(보다 덜 프루스트적인)가 있다. (중략) 듀안 마이클이 앤디 워홀을 촬영했다. 앤디 워홀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이것은 도전적인 인물 사진이다. 나는 이 감추기 놀이(이것이 바로 스투디움이다)를 지적으로 해설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앤디 워홀은 아무것도 숨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손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 사진의 푼크툼은 몸짓이 아니라 생기없이 거무스레하게 무리진, 끝이 넓적한 손톱의 불쾌한 질감이다. (p51)
수환: 예를 들어 여러분이 관공서나 건물 같은 지하 주차장을 갑니다. 그럼 장애인 주차장이 있죠. 다른 데는 다 차가 세워져 있고 장애인 석만 비워져 있어. 그 사진을 찍었어. 다 다른 장소의 수십 장을 찍었어. 이 사람이 좀 꽂혀가지고. 주차장에 장애인 용 자리가 비워져 있는 것만 다 찍은 거에요. 그걸 보고 여러분은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문화적으로 읽으면 우리나라 좋은 나라. 우왕ㅋ굳ㅋ. 우리나라 소수자 배려 킹왕짱. 근데 이 사람은 이걸 계속 찍다 보니까 다른 생각이 들었다는 거거든. 여러분도 바르트 말처럼 광인, 미치광이, 어린아이, 야만인의 시선으로 봐봐요. 그 사람의 표현에 따르면 이걸 하다 보니까 뭐 이런 미련스런 짓이 있나. 싶더라는 거죠. 거의 보통은 차가 없거든. 비워져 있어. 근데 왜 굳이 다 비워야 하지? 라는 생각을 했다는 거죠. 여러분. 여러분이 뭔가를 볼 때 스투디움을 다 벗겨내고 푼크툼적으로 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세요.
22번에서는 이름 붙일 수 없음에 관한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죠.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예를 들어 우리가 별난 거, 특이한 거, 이상한 거, 변태적인 거. 그런 걸 보면 아~ 엽기적이야. 그렇게 얘기하죠. 하지만 그렇게 말한 순간 이미 나에게 고통이나 혼란을 주지 않아요. 내가 엽기적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니까.
바르트: 푼크툼에 관한 마지막 문제는, 그것이 선명한 윤곽을 갖건 혹은 그렇지 않건 간에 하나의 추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거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루이스 하인이 찍은 허약한 두 아이에게, 그들의 옆모습에서 보이는 정신박약성을 덧붙이지 않는다. 나보다 먼저 약호가 그것을 말하고 나의 자리를 빼앗아 내가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p58)
수환: 정리를 해보죠. 일단 푼크툼 사진이라는 것은 어떤 하찮은 세부. 그것은 문화적 코드에서 벗어나있고. 왠지는 모르겠으나 나에게 아주 큰 강도를 가지고 작용해. 왜 작용했나 생각해보면 나 자신의 무언가를 거기에 투사한 거야. 나 자신과 그것이 만난 거에요. 그건 날 찌르고, 내가 그것에 추가한 거죠. 문화적인 약호나 관례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고.
그러다 24번에 이르면 바르트가 사람을 완전 바보 만드는데. “나는 아직도 사진의 본질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중략) 보편적인 것을 알아볼 수 없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중략) 나는 나의 개영시를 써야만 했다.(p61~63)”고 말하고 있죠. 개영시. 먼저 썼던 얘기를 취소하는 거에요. 지금까지 푼크툼에 대해서 했던 모든 얘기 다 취소. 어쩌라구? 이 책에 이어지는 뒷부분은 2부 입니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죠. 바르트가 “온실사진”이라고 부르는 자신의 어머니가 온실에서 어릴 때 찍은 사진들. 그게 푼크툼이래요. 그런데 중요한 건 이 책 어디에도 그 사진이 실려있지 않아. 어쩌면 없는지도 몰라. 어머니는 바르트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에요. 바르트는 결혼도 안 했고. 근데 어머니가 죽고 나서 온실사진을 보고 마음에 뭔가가 찔러졌어요. 굉장한 푼크툼. 그런데 우리가 그걸 읽고 만약 아, 그렇구나~ 이해해버리면 사실 그것도 푼크툼이 아니죠.
다음시간까지 각자의 푼크툼의 잡아오되, 설명을 해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그렇다고 또 완전히 공감하면 안 되겠죠. 불가능한 작전. 바르트가 시도했던 불가능한 작전. 여러분은 해볼 수 있겠습니까?
결국 정리를 하면. 푼크툼 읽기가 왜 중요한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겠죠. 남들이 다 그러리라고 수긍하는 것을 벗어난 읽기. 나만의 특이한 읽기. 언어. 지난 시간에 나만의 언어를 갖는 게 얼마나 힘든지 말했죠. 오늘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나만의 “읽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가? 내가 뭔가를 읽는다고 말한 순간 이미 그것은 스투디움이 되어버리고 더군다나 그것을 남이랑 공유하기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미치광이, 광인의 시선을 갖는 거.
자끄 라캉이라는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가 있어요. 이 사람은 소쉬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사람의 여러 개념이 있지만 대표적인 세가지 항이 있어요.
상상계 imaginary 와 상징계 symbol, 실재 the real.
우리는 상징계에 살고 있어요. 우리는 소쉬르를 배웠으니까 설명할 수 있어요. 상징계는 기호체계에요. 라깡의 경우, 상징계는 법입니다. 아버지이기도 해요. 사회적인 컨벤션. 우리는 태어나기도 전에 상징계의 어느 자리에서 각자의 위치가 결정됩니다. 인종. 지위. 그것이, 그것들의 관계가 여러분이 누구인지 결정합니다. 라깡은 “사회라는 것의 비인격적인 틀” 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것이 바로 상징계입니다.
실재 the real. “the real”은 “real”과 달라요.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그런 대사가 있죠.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실재의 사막에 온 걸 환영합니다. 슬라보예 지젝이 이걸 패러디해서 책도 썼는데. 하여간 실재는 상징계 이전, 야만. 전문화적. 그런 게 실재계일 수 있죠. 근데 그것만 실재계냐? 상징계 이후일 수도 있다. “상징계 이전, 그것 이후의 이명” 그렇게 표현했어요. 자, 다시, 푼크툼은 흘러 넘쳐서 남는 것이죠. 오버하는 거. 상징계로 깔끔하게 포장이 안 되고 뭔가 흘러 넘치거나 혹은 딱 구획이 안 되고 구멍이 비는 거. 그런 게 실재계죠.
이렇게 얘기하면 이건 음모론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 있어요. 매트릭스처럼. 하지만 이런 생각은 철두철미하게 이중화된 스투디움이죠. 그런 식의 더 리얼한 상징계를 생각하는 것.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컨벤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아까도 스투디움과 푼크툼은 고전적인 소나타처럼 “같이” 온다고 했잖아요. 언뜻언뜻. 라캉은 그걸 “실재계가 침입한다”고 표현해요. 실재계가 침투해 들어오는 순간. 그걸 경험할 수 있다면 그건 푼크툼을 찾아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징계 속의 삶에 자기를 잘 녹아내면 운전을 하는 상태가 돼요. 자동기계 상태. 우리는 운전을 하면서 아무 생각 안 합니다. 반복된 행위를 그저 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 순간! 라캉의 비유로는 갑자기 트럭이 저쪽 차선에서 나에게 오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결정을 해요. 순간적으로 핸들을 틀거나 브레이크를 밟거나. 상징계의 문법 코드는 중요하지 않고, 실재계가 팍 들어오는 순간 내가 어떤 결단, 선택을 해요.
주체라는 것은 상징계 속에서 만들어지지만 그것에 묻혀서 살면 자동기계 속에서 살게 된다는 거죠. 만약 이 둘 간의 상호작용이 없다면 주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주체로서 살아가고 있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는 실재. 푼크툼. 그것으로 상징계 구성을 교란시키고, 더 나아가서 상징계를 다시 “분절”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그것은 얼마나 무섭고 힘든가? 아무도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 스스로 결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없다면 주체는 없다”는 라캉의 명제를 마지막으로 생각해보면서 오늘의 수업은 여기까지.
숙제) 각자의 푼크툼 찾아오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