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강의록] 책상은 책상이다 : 기호의 자의성과 차이의 의미론
2008/03/19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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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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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 화 / 강사: 김수환
김수환: 오늘 우리가 수업시간에 할 얘기는 뭘까요? 언어에 관한 것이죠. 더 정확히는 언어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라는 언어학자의 이론, 언어이론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한 진입로랄까 맛보기로 글 한편을 소개했습니다. ‘책상은 책상이다’ 블로그에 올라가 있죠. 읽어보셨죠? 재밌었나요? 무슨 얘기에요?
가람: 책 뒤에, 사회 속에서 뭐랄까 고립된 사람들.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써 있었어요.
허브: 언어의 대중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누군가가 혼자만의 단어를 썼을 때 혼자서는 되지만 그게 ‘나무’가 되어야 할 때는 되지 못하는 것?
수환: 가람은 좀 더 광범위한 주제를 말했다면 허브는 언어에 관한 문제를 얘기했죠. 대중성이라고 표현했는데 어떻게 타인과의 소통을 언어로 할 수 있을까? ‘책상은 책상이다’ 라는 소설은 단편이라기에도 짧은데 처음과 끝에 그런 말이 나오죠. 이 이야기는 슬프게 시작해서 슬프게 끝난다. 여러분도 슬펐나요? 주인공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왜 책상을 책상이라고 불러야 하지? 책상을 양탄자로 불러볼까? 양탄자는 사진으로 불러볼까? 라고 해서 자기만의 언어를 갖게 되었는데 결국엔 아무도 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어서 슬프게 죽었다. 혹시 그 이야기를 읽고서 주관적으로 나름대로 받아들이신 분 더 있나요?
오드리: 그 책 뒤에 보니까 중년남성의 강박증? 이라고 적혀 있던데요.
수환: 그것도 흥미로운 부분이죠. 이 남자가 왜 얼토당토 않은 시도를 하게 됐을까?
오드리: 심심해서.
수환: 자기를 둘러싼 이 세계가 너무나 반복적이고 달라지는 게 없어서. 어느 날 모든 게 달라진 거 같아서 기분 좋게 집에 왔는데 집에는 여전히 시계가 똑딱대더라. 자기 주변을 바꿔보고 싶었는데 그것을 위해서 그가 한 최초의 시도가 말을 바꿔 보는 것이었죠. 주변 세계의 심심함 무료함 반복적임을 괴롭게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런 시도를 하지 않겠죠. 어쨌든 이 남자는 불행하게 죽었어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는데 왤까?
가람: 자기만의 언어로 타인과 소통하지 못해서.
수환: 가장 상식적인 정답이죠. 만약 타인과 소통할 수 있었다면? 예를 들어 여러분이 이 소설을 다시 쓰기 해보겠다, 이 남자를 불행한 삶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 후편을 다시 써보겠다면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유란: 말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을 더 모아서 같이 놀다가 말을 퍼뜨려서 세계적으로.. 사람들을 늘려가서 어딜 가도 자기들만의 언어를 계속 주입을 시키고..
수환: 예를 들면 다음 카페에 ‘이런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들’ 활동을 해서 회원이 천명 만명이 되고 후원자가 생기고 작은 케이블 방송을 접수, 외계어로 방송을 하고 초등학생들이 따라 해. 어느 날 보면 부모도 하게 돼. 총선에 정치세력화를 이뤄서 정당을 이룬다.. 과연 그렇게 한다면 세계는 달라질까? 예를 들면 책상은 책상이다. 라고 사회가 규정했다. 하지만 나는 자기만의 새로운 어휘집을 갖게 되고 그걸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게 대세가 된다. 그래서 더 이상 책상을 책상이라 부르지 않고 양탄자로 부르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렇다면 이 세계가 달라질까? 그럼 좀 더 접근한 예로, 여러분들이 하자에 오면 이름을 바꾼다고 알고 있어요. 적어도 이 사회 속에서는. 왜 그렇게 하나요?
나르샤: 언니, 오빠, 교수, 선생, 계급이 나눠진 호칭을 쓰지 않게 하려고.
수환: ‘리사’ 라든지 ‘온달’ 이런 식의 이름은 스스로 짓나요? 왜 이런 이름을 짓죠?
리사: 원래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주시는데 리사, 온달, 나르샤 이런 이름은 자기가 뜻을 부여해서 난 이런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하는 거죠.
수환: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달라져요?
가람: 이 안에서는. 가람으로서.
수환: 이 사회 안에서 가람이라고 부르면 새로운 존재가 되는 건가요?
가람: 전 그렇게 생각해요.
수환: 그런 사람들이 많아서 개명을 합니다. 개명을 하면 자기가 달라지나?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는 거죠. "이름"과 "존재(사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책상을 꼭 책상이라 불러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어요. 영어로는 테이블인데. 이름이 필연적이라면 김수환 추기경과 나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어야겠지만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이름과 존재 사이에 근본적인 연결, 필연적인 연결은 없다고 봐야겠죠. 어릴 때 빨간색으로 김수환 김수환 적으면 불쾌하고 안 될 것 같고. 부도교 신자들은 누군가에게 저주를 내릴 때 그 사람 이름을 적는다든지 그 사람 모양의 인형을 불태우고 찌르고 하죠. 그러면 그 사람이 실제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고 하죠. 우리는 이름과 존재 사이에 뭔가 연결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작명소가 먹고 살고 하자에서 새로운 이름을 짓는 거죠. 이 뭔가 있다는 입장에도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존재가 먼저 있고 그것을 지칭하는 이름이 따라붙는다는 입장이 첫 번째. 두 번째 입장은 반대겠죠. 어떤 이름이나 기호가 먼저 있고 그것이 존재나 사물을 규정한다. 여러분이 하자에 와서 이름을 바꾸는 행위는 후자죠.
페르디낭 드 소쉬르라는 20세기 초반의 언어학자는 언어에 관한 여러 가지 얘기를 했지만 출발점은 바로 이겁니다. 이름과 사물 사이에 본연적인 연결이 없다. 더 나아가서 존재가 사물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이름이 존재를 결정한다고 봤어요.
소쉬르가 ‘일반언어학 강의’라는 책을 냈습니다. 죽은 뒤 3년 뒤인 1916년에 제자들이 출판한 책이에요. 결벽증이 있어서 학위논문을 제외하고는 생전에 한 권의 책도 출판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언어학 강의라는 책은 현대 언어학의 고전이며 20세기적인 인식론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책입니다. 뭐, 공시 언어학의 창시자다, 기표와 기의 개념을 말했다, 랑그와 빠롤.. 그것들을 외우는 것보다는 그 개념이 파생시킨, 우리의 상식을 깬 지점이 뭐였는지 아는 게 더 중요합니다.
기호의 “자의성”부터 시작할게요. 기호는 자의적이다. 라고 소쉬르가 말했습니다. 여기서 기호라는 것은 어느 하나의 것이 다른 하나의 것을 대신해서 표현하는 모든 것. 싸인. 언어는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기호죠.
1) 자의성
흔히 자의성을 ‘말(이름) – 사물’ 간의 관계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소쉬르가 말한 건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라는 뜻입니다. 기표는 영어로 signifier 입니다. “의미하는 것” 이란 뜻. 기의는 signified “의미 되는 것”이란 뜻입니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표는 청각영상이다라고 했어요. 청각영상은 말(이름)과 어떻게 다른가? 제가 사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귀로 사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청각영상은 어디 있어?
허브: 듣는 순간 떠올려지는..
수환: 제가 말하거나 쓰면 여러분 머리 속에는 떠올려지는 청각영상이 남습니다. 어떤 억양과 길이로 읽어도 여러분은 사과라는 동일한 청각영상으로 받아들여요. 어떻게 그렇죠? 여러분은 우리말 사과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다고 얘기하겠죠. 제가 사과를 칠판에 그려. 진짜 완전 똑같이. 그리고 아주 단순화시킨 또 다른 사과를 옆에 그려요. 하지만 여러분은 둘 다 사과로 받아들이겠죠. 왜죠?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게 감이 오나요? 소쉬르가 청각영상이라고 말한 것은 여기 적혀있는 사과라는 글자나 발음된 음성은 아니에요. 청각영상은 여러분 머리 속에 있는 거에요. ‘안녕 프란체스카’에 보면 박희진이 이 봐보야~ 하잖아요. 제 친구 중에도 그런 애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외국인이 이 봐보야~ 라고 말해도 여러분은 바보라고 알아듣죠. 하지만 예를 들어 여러분이 뉴욕 호프집에 가서 give me one veer 하면 못 알아듣죠. 우리 말에서 봐보야와 바보야는 차이가 없어요. 왜죠? 영어권에서는 V 발음과 B 발음의 차이를 감지합니다. 하지만 우리 말에는 두 발음간의 차이가 없어요.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감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봐보라고 해도 바보로 받아들이는 거에요. 사과를 다른 억양으로 읽어도 사과라는 동일한 청각영상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즉 물리적인 차이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게 공통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 청각영상 그게 ‘기표’에요.
그럼 ‘기의’는? 제가 사과라고 했을 때의 기의는? 정말 사과? 그게 상식적인 생각이죠. 사물. 하지만 소쉬르가 얘기한 건 달라요. 우리가 자유라고 하면 자유라는 기표가 떠오르지만 동시에 자유에 대한 사전적 정의도 떠오르죠. 소쉬르는 그것을 ‘개념’이라고 불렀어요.
즉 소쉬르가 말한 자의성은 청각영상과 개념 사이의 관계가 자의적이다. 라는 거에요. 기표와 기의가 결합된 것이 ‘기호’거든요? 기표와 기의는 모두 여러분의 머리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에요. 말이나 사물처럼 현실 속에 있는 게 아녀요. 소쉬르 표현을 빌면 “심리적인 실체”입니다. 머리 속, 정신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죠.
인간이 물리적인 세계를 떠나서 뭔가를 뜻하고 말하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걸리버 여행기’를 보면 어느 도시에서는 말의 폐해가 너무 커서 새로운 소통방식을 창안했는데 물건들을 끈으로 매달아 달고 다니다가 직접 보여주는 식의 소통이었어요. 불편하죠. 게다가 정의나 선, 자유 이런 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죠. 하지만 그렇게 소통했을 때 절대절명의 장점 하나가 있죠. 오해가 없어요. 그리고 거짓을 말할 수 없죠. 즉 인간이 기호를 생각하면서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생기죠. 움베르토 에코 같은 기호학자는 기호학을 거짓말에 관한 모든 것이라고 정의했어요.
기표와 기의 간의 관계는 자의적입니다. 물론 소쉬르를 떠나서, 말을 기호로, 사물을 세계로 넓혀서 생각하자면 둘 간의 관계도 자의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EBS 지식채널 보셨나요? 랑그와 빠롤에 관해 나오죠? 그것도 소쉬르의 ‘자의성’에 대한 잘못된 해석처럼, 순진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랑그를 사회, 빠롤을 개인. 흔히 이렇게 말해요. 랑그는 사회적 약속이고, 구체적인 개인들이 말을 사용하는 게 빠롤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랑그는 추상적인 것이고 빠롤은 구체적인 것이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랑그는 여러분 머리 속에 있는 규칙, 그것을 여러분이 실제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파롤이다. 소쉬르는 언어학이라는 학문이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빠롤이 아니라 랑그다. 라고 얘기했어요. 여러분 각자가 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어떤 추상적인 체계를 탐구해야 하고 그게 언어학이다.
세 번째로, “가치”. 어떤 사물 혹은 존재의 가치라는 것은 그 사물이나 존재 자체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을 가치의 의미론이라고 해요. 바로 ‘차이’입니다. 어떤 것을 어떤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체계 속에서 다른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 다른 것들과의 차이다, 라고 소쉬르는 말했어요. 이게 무슨 뜻이죠? 소쉬르는 이걸 설명하려고 체스 판 예를 들고 있습니다. 체스 안에서 각각의 말들의 가치는 어디서 오냐? 그 말들이 어느 위치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결정 됩니다. 그 말이 상아로 만들어졌냐 종이로 만들어졌냐는 중요한 게 아니죠. 우리도 장기 두다가 졸이 없어지면 바둑알 갖다가 거기에 둡니다. 그래도 지장 없어요. 장기판이라는 체계 앞에서 어느 위치에 있느냐, 너의 기능이 뭐냐, 졸은 졸의 위치와 펑션이 있어요. 졸은 왕이 아니기 때문에 졸이에요. 신호등의 빨강 노랑 초록. 하나의 체계죠. 빨간 불이 전구가 나갔어. 그래도 운전자들, 그니까 신호등 체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운전할 수 있어요. 파란 불 깜박깜박, 노란 불 깜박깜박 그 다음에 빨간 불이죠. 그걸 알면 빨간 불이 들어오지 않아도 알 수 있죠. 이런 생각은 매우 급진적인 거에요. 여러분들 각자의 가치가 본연의 존재로부터 오는 게 아니고 내가 속해있는 체계 속에서 다른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 그들과의 ‘차이’가 나의 가치를 만든다는 겁니다. 즉 개념은 순전히 차별적인 것이고, 그 본질적 내용에 의해서 적극적으로(positive)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즉 negative 하게 정의된다는 거에요. 니가 무엇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 무엇이다, 이거죠. 그래서 소쉬르는, 엄격하게 얘기하자면 언어는 차이들의 체계다. 언어에는 오직 차이들만이 있다. 고 얘기했어요. 이 말을 다르게 풀자면 어떤 것의 의미는 그 자체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속해있는 체계가 있고 그 체계 속에서 그것이 다른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온다. 라는 것이죠.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것’만 볼 게 아니라 그것이 다른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언어체계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언어가 나름의 고유한 법칙과 구조를 갖고 있다고, 소쉬르는 생각했죠. 그럼 설명해야겠죠. ‘말(기호)-사물/세계’.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이 기획한 혁명은 하나하나의 사물 이름을 바꿔보는 것이었죠. 그 사람의 생각은 다음 전제를 깔고 있어요. 언어라는 것은 이름들의 묶음이다. 어휘집이다. 라는 거죠. 그래서 그 어휘집을 새롭게 뒤죽박죽 바꿨습니다. 결정적으로 이 사람이 실패한 지점. 이 사람이 소쉬르를 읽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언어는 결코 어휘집이 아니에요. 언어는 체계입니다. 에스키모들이 눈을 지칭하는 어휘를 이십 여가지 갖고 있다는 말 들어보셨죠. 아프리카의 어느 종족은 초록색을 구분하는 어휘를 여러 개 갖고 있어요. 우리가 보는 눈과 에스키모가 보는 눈이 다를까요? 내리는 눈은 같은데. 그들은 우리와 다르게 눈이라는 같은 대상을 잘게 쪼개고 있어요. 이 쪼갠다는 말을 “분절한다”고 표현해요. 자른다. 여러분이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쪼갤 수 있다는 뜻이에요. 여러분. 시간이 뭔지 알아요? 시계는 시간을 열두 개로 쪼개놨죠. 시간 자체는 분절된 게 아니고 쭉 연결되어 있어요. 하지만 그걸 쪼개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바뀝니다. 문제는 그 쪼개는 방식이 다 같지 않다는 거에요. 에스키모가 눈을 쪼개는 방식과 우리가 눈을 쪼개는 방식이 다르잖아요? 우리는 형 동생 언니 오빠 많이 쪼개잖아요. 영어로는 brother sister 두 개뿐이죠. 말레이시아는 성차의 구분조차 없대요. 형제면 형제. 하나로. 이 말은 ‘사물-세계’가 먼저 있고 그걸 ‘말’이 수식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거죠. ‘말(기호)’이라는 것은 ‘사물(세계)’를 나름대로 분절하고 있어요. 여러분이 하자를 들어오기 전에 나름대로 분절된 단위를 살고 있었습니다. 초6년 중3년 고3년. 그건 우리나라가 그렇게 나눈 거죠. 근데 여기 들어오면 길찾기 주니어 시니어 이렇게 나누죠. 최소한 두 가지의 변화를 겪은 거에요. 이름을 새로 부여했고, 기존의 분절 시스템이 아닌 다른 분절 시스템으로 들어왔어요. 첫 번째 사안, 즉 여러분이 이름을 바꿨다는 것은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다운 발상이죠. 언어를 어휘집으로 보는 발상. 하지만 두 번째 사안은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이 생각하지 못했던 거에요. 분절의 시스템을 바꾼 거죠. 여러분 이전에, 여러분과 함께, 어떻게 하면 새로운 분절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왔던 다른 분들이 그 시스템을 만든 거죠. 만약 여러분들이 그 분절의 시스템에서도 또 벗어나고 싶다면 또다시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다르게 뜯어볼 수 있을까 생각해야겠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이름을 단순히 바꾸는 것보다 분절을 새롭게 끊어내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것. 개인이 아닌 집단의 집약된 힘이 작용해야 한다는 것.
이번엔 소쉬르가 말한 네 번째 원칙입니다. “기표”의 선형성(linearity). 기표는 선형적이다. 라는 건데. 그건 라인을 쭉 그리면서 쭉 순차적으로 간다는 뜻이에요, 기표가. 뭔 소리냐? 우리는 결코 두 가지 음을 동시에 낼 수 없다는 겁니다. 입이 하나고 발성기관이 하나기 때문에, 반드시 순차적으로만 낼 수 있습니다. 언어는 음성을 통해서 표현되고 그렇기 때문에 시간 축에 의해 순차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형성을 갖는다. 언어라는 것은 말들의 연쇄, 말들의 사슬이다. 그럼 이런 거 말고 한꺼번에 동시에 확 제시되는 경우는 불가능할까?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는 안->녕->하->세->요 하고 붙여가는 방식으로 쓰고 읽죠. 그럼 이런 거 말고 각각의 구성성분이 한꺼번에 몽창 제시되는 경우는 없나? 시간 축 상에서 제시되는 게 아니라 공간 축 상에서 제시되는 거. 그림이 그렇죠. 해, 산, 사람이 있는 그림을 볼 때 해->산->그림 순서로 보나요? 동시적으로 제시되죠. 즉 소쉬르가 선형적인 기표라고 말할 때는 그림, 이미지는 제외되는 표현인 거죠.
이쯤에서 정리해봅시다.
그럼, /가람이/ 대신에 이 수직축에 올 수 있는 것들이 있죠. 다른 사람들 이름 다 쓸 수 있죠. /하자 인문학 강의에/ 대신에도 다른 게 올 수 있죠. 작업장에, 집에.. /간다/ 대신에도, 빠진다, 온다, 가고 있다..
내가 ‘가람이가’ 라고 말할 때는 그 밑에 다른 단어들이 좍 깔려있어요. 3D 애니메이션 느낌을 떠올려보세요. 그 많은 단어들 중에 ‘가람이’를 위로 불쑥 선택한 거죠. 다른 단어들도 마찬가지. 그렇게 올라온 것들이 서로서로 이어져서 ‘결합’이 됩니다. 그 과정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 두 가지 프로세스를 하고 있는 거죠. ‘선택’과 ‘결합’. 선택하고, 결합하고, 선택하고, 결합하고.. 그러면 그게 말이 됩니다. 문장이 돼요. 선택이 이루어지고 있는 세로축, 수직축을 소쉬르는 ‘계열축’이라고 부릅니다. 선택된 것들이 서로서로 결합하고 있는 수평축을 소쉬르는 ‘통합축’이라고 부릅니다. 즉 언어는 계열축과 통합축 사이에서 선택과 결합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계열축에 있는 많은 요소들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서로 ‘대체’될 수 있는 관계에 있어요. 한편 통합축 상의 요소들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관계에 있어요.
인간의 언어는 이런 구조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계열축 상에서 서로서로 대체될 수 있는 관계, 등가를 이루고 있는 것들과 관계가 있고. 통합축 상에서 서로서로 연결될 수 있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어요. 아무거나 연결될 수는 없어요. 문법에 의해 맞는 것이 있죠. 예를 들어 어느 어린아이가 인식은 다 하는데 말을 못해요. 엄마가 말을 가르칩니다. 연필. 연필을 보여주면서 “이게 뭐야?” 물어봐요. 애는 연필이란 단어를 모르지만 내가 그걸 알고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어. 그럼 다른 사물을 기호로 사용해서 내가 연필을 안다는 걸 표현하려 한다. 그럼 볼펜을 집어서 그걸 들이대. 그럼 볼펜과 연필이 등가의 관계라는 걸 표현한 거죠. 그럼 또 다른 경우 뭘 보여줄 수 있을까? 종이? 그렇죠. 종이는 통합축 상에서 결합되고 연결될 수 있는 관계죠. 우리가 뭐, 프로이트를 읽지 않았더라도. 암튼 꿈에서 욕망이 너무 직접적으로 나타나면 놀랍니다. 꿈에서도 검열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꿈에서는 다른 사물로 대체해야겠죠. 누군가를 사랑해. 이건 금지된 사랑이야. 근데 욕망이 있어서 꿈에 나타납니다. 지금 정말 유치한 수준으로 얘기하고 있어서 프로이트에게 미안한데, 암튼 그 욕망은 어떤 식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겠죠. 정말 유치한 수준으로 흔히 그런 얘기 하잖아요? 딱딱하고 긴 게 나오면 무조건 남근이다. 만약 그런 게 나오면? 그건 ‘대체’ 관계죠. 남근과 딱딱하고 긴 물체 사이에는 대체 관계가 있죠. 더 정확하게는 ‘유사’ 관계. 꿈에 유독 계속 빨간 색이 나온다. 예를 들면 사막에서. 방에 들어가도 빨간 색. 밖에 나와도 빨간 색. 계속. 그럼 그건 뭘까? 알고 보니 그 여자가 빨간 색 외투를 입고 다녔다. 그 여자가 있을 땐 항상 빨간색이라는, 그 여자와 결합된 빨간색이 떠오른다. 이건 통합축 상에서의 일이죠.
로만 야콥슨이라는 러시아 출신의 언어학자가 있어요. 그 사람이 소쉬르의 개념을 가져다가 ‘선택축’과 ‘결합축’ 이라고 이름을 바꿔 불렀어요. 이 사람이 실어증 연구를 했는데, 흥미롭게도 두 가지 유형으로 갈리더라는 거죠. 하나는 선택축이 맛이 가는 경우, 둘은 결합축이 망가지는 경우. 둘 다 망가지는 경우는 없더라는 거죠. 선택축이 망가지고 결합축이 작동하는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 이 사람은 선택을 못해, 단어를 꺼내지를 못해, 하지만 연결은 시켜. 그러면 말의 형태는?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처럼 되겠죠. 문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어요. 근데 이 사람의 증상은 말을 시작을 못해요. 하지만 어떤 사람이 말을 하면 연결해서 응답하는 건 잘하죠. 뜻이 전혀 통하지 않은,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말하겠죠. 그럼 선택축은 괜찮은데 결합축이 망가진 사람들은? 흔히 얘기하는 일분 발화. 단어 하나로만 말하거나 단어들만 죽죽죽죽. 주로 애들. 혹은 남대문 시장 아저씨들이 영어를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결합규칙에 해당하는 문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죠.
소쉬르의 언어 매카니즘은 단순히 언어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고하는 체계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죠. 예를 들어..
(파워포인트 프리젠테이션으로 수직축과 수평축 사고체계로 풀어낼 수 있는 지면 광고 등을 살펴봄. (윽. 제 컴퓨터에 그 파워포인트가 있어서 적지 못했어요. 죄송..)
SK 광고 중에 ‘여보세요’에 해당하는 각국의 단어들을 죽죽 나열한 게 있었죠. 그 CF는 ‘여보세요’와 대체할 수 있는 유사관계에 있는 단어들을 죽 결합해서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죠. 결합의 원리는? 순서대로 나열되는 인종들. 제가 수업 후 몇 가지 예들을 블로그에 올릴게요. 여러분들도 직접 이런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계열축에서 선택/대체될 수 있는 항들의 목록은 소쉬르의 표현을 빌자면, “부재 속에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아, 깔려있는 가능성. 근데 그 중 어느 하나가 선택이 되면 위로 탁 올라오는 거죠. 그것이 통합축 속에서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이것도 소쉬르의 표현에 따르면, “현존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원리는 단순히 언어의 매카니즘 뿐 아니라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서 사고하는 방식 자체, 의미가 결정되는 과정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시장에 내놓을 때 그 제품이 이 시장에 어느 정도 위치에 들어갈 수 있는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걸 positioning이라고 하죠. 시장조사를 먼저 하는데, 어떤 팀에서 제안한 게 이런 게 있었어요. 마트에 가서 어떤 사람이 우리 제품과 동일한 가격대 라인에 있는 제품을 집으면 그 사람을 계속 쫓아다녀요. 그 사람이 다른 제품군에서는 뭘 고르는지를 보는 겁니다. 그걸 죽 연결하면 그 사람의 소비패턴이 하나의 문장으로 나오겠죠. 이 사람은 선택을 하면서 결합을 하는, 그 과정을 거쳤던 겁니다. 그럼 그 결론과 잘 결합할 수 있는 아이스크림을 내놓으면? 그것을 고르겠죠. 그런 기획안을 내놨다가 아이디어는 참신하나 실행하기 어렵다는 평가 얻은 적 있어요. (웃음)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는 이야깁니다.
의미라는 것이 어디에 귀속되는가? 전통적인 입장은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어요. 첫 번째는 재현적 입장 혹은 접근. 영어로는 representational approach. “사람”이 “기호체계”를 사용해서 “세계”를 말할 때, 재현적 입장이란, 의미라는 것은 “세계”에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 “세계”를 이 “기호”가 재현하고 있다고 보는 거죠.
두 번째 접근은 의미가 이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기호”를 이용해서 표현하는 “나”, “사람”에게 있다. 그걸 의도적 접근. 이라고 합니다. intentional approach.
그렇다면 소쉬르의 입장은? 의미는 “세계”에도 “사람”에게도 없고 “기호”에 있다고 봅니다. 이걸 구조주의적, 구성주의적 접근이라고 합니다. 결국 “기호”가 “세계”를 구성하고 “인간”을 구성한다는 소립니다. 이것이 구조주의적, 구성주의적 접근의 인식론입니다. 우리가 의미를 이해할 때, 근본적인 것은 체계 속에서 각각의 요소들이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 즉 그 관계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호세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계”, “여러분 자신”까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내가 바뀌어야 세계가 바뀐다, 세계가 바뀌어야 내가 바뀐다, 소쉬르에 의하면 둘 다 아니에요. 기호를 바꾸어야 한다. 세계에 대한 재현을 바꾸어야 한다. 어떻게? “기호체계”라는 건 세계를 이해하고 분절하는 방식입니다. 그게 바뀌어야 하는 거죠. 여러분이 하자에 와서 바뀌었다, 혹은 바꾸려고 하는 많은 것들이 있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내”가 바뀌면? 바뀌는 게 있고 바꿀 수 없는 게 있죠. 그럼 안 되는 건 왜 안 되는가? 만약 “기호”가 없이 “세계”와 “인간”만 있다면 세상만물이 훨씬 간단하겠지만, 둘 사이에는 “기호”라는 엄청난 제 3항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건 사회적인 약속, 규칙일 수 있어요. 그건 막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자의성이라고 소쉬르가 표현했던 언어의 속성이라는 것은, 언어는 태어날 때 그니까 선천적으로는 자의적이지만 후천적으로는 자의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언어 그 자체는, 다시 말해 사회적 약속 자체는 자의적이다. 하지만 구성원들 개개인한테 그 약속은? 강제로 다가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자의적인 거에요. 절대절명의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상황, 여건, 의지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요.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결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느끼기에는, 사회가 부과하는 강제적인 규율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어떻게 대응하면서 살아가는가? 우리가 생각해볼 문제겠죠. 제가 생각했을 때 우리는 각자 줄타기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사회가 부여한 규칙, convention, 관례를 타고 따라가요. 그러지 않으면 떨어지거나 고립되거나 심한 경우엔 감금됩니다.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조금씩 일탈을 하죠. 그 상황에서 자기의 창조적인 자의성을 표현하려 합니다. 줄타기. 그 줄타기는 모종의 집단적인 성격, 제도적인 성격을 띨 수도 있습니다.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이 실패한 지점일 수도 있고 우리가 더 나아가야 할 지점일 수도 있겠죠.
우리는, 이제부터는, 내가 어떤 것에 대해서 ‘이건 이거야’, ‘저건 저거여야만 해’, 하기 전에 물어야만 할 것이 있겠죠. 이게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가? 이게 기호세계 속에서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단순히 바라만 보는 게 아니라, 그 내부에서 의미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분절돼서 어떤 관계들 속에서 구축되어 있는가? 그걸 분석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 분절의 지점들을 조금이라도 다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람이 하자에 갔다”는 문장의 빈틈을 조금이라도 파고들어 비틀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혁명입니다. 그 구조를 냉철하게 분석할 수 있어야, 여러분에게 부여되어 있는 사회적 convention을 조금이라도 새롭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 신청서를 읽어보니, 나의 말, 나의 언어로 말하고 싶다는 분이 꽤 있었는데, 그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건 나만의 어휘집을 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건 나만의 어휘집이 아니라 나만의 의미생성 법칙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훨씬 더 어렵고 지난하며 분석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작업입니다.
오늘 우리가 얘기한 것은 전적으로 언어, 인간의 말에 관한 얘기였습니다. 소쉬르는 언어학자였으니깐. 그래서 언어 이외의 것들을 배제했어요. 다음 시간에는 그 배제된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할 겁니다. 이미지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표현되는가? 그건 소쉬르가 이야기한 것과 다를 수도, 같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지 이야기를 하기 전에 소쉬르의 중요한, 절대적인 한걸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기호 중에 언어는 가장 중요하며 대표적인 것이다. 소쉬르는 “우두머리”라는 표현을 썼는데. 하여간 다음시간에는 이미지에 좀 더 집중하겠고, 그 중에서도 사진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숙제)
통합축과 계열축 상의 원리를 통해서 의미가 구축되는 예들을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자.
선택과 결합이라는 원리를 사용해서, ‘어떤 대상의 의미가 이렇게 구축됐다’ 를 설명해보는 것!
김수환: 오늘 우리가 수업시간에 할 얘기는 뭘까요? 언어에 관한 것이죠. 더 정확히는 언어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라는 언어학자의 이론, 언어이론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한 진입로랄까 맛보기로 글 한편을 소개했습니다. ‘책상은 책상이다’ 블로그에 올라가 있죠. 읽어보셨죠? 재밌었나요? 무슨 얘기에요?
가람: 책 뒤에, 사회 속에서 뭐랄까 고립된 사람들.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써 있었어요.
허브: 언어의 대중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누군가가 혼자만의 단어를 썼을 때 혼자서는 되지만 그게 ‘나무’가 되어야 할 때는 되지 못하는 것?
수환: 가람은 좀 더 광범위한 주제를 말했다면 허브는 언어에 관한 문제를 얘기했죠. 대중성이라고 표현했는데 어떻게 타인과의 소통을 언어로 할 수 있을까? ‘책상은 책상이다’ 라는 소설은 단편이라기에도 짧은데 처음과 끝에 그런 말이 나오죠. 이 이야기는 슬프게 시작해서 슬프게 끝난다. 여러분도 슬펐나요? 주인공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왜 책상을 책상이라고 불러야 하지? 책상을 양탄자로 불러볼까? 양탄자는 사진으로 불러볼까? 라고 해서 자기만의 언어를 갖게 되었는데 결국엔 아무도 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어서 슬프게 죽었다. 혹시 그 이야기를 읽고서 주관적으로 나름대로 받아들이신 분 더 있나요?
오드리: 그 책 뒤에 보니까 중년남성의 강박증? 이라고 적혀 있던데요.
수환: 그것도 흥미로운 부분이죠. 이 남자가 왜 얼토당토 않은 시도를 하게 됐을까?
오드리: 심심해서.
수환: 자기를 둘러싼 이 세계가 너무나 반복적이고 달라지는 게 없어서. 어느 날 모든 게 달라진 거 같아서 기분 좋게 집에 왔는데 집에는 여전히 시계가 똑딱대더라. 자기 주변을 바꿔보고 싶었는데 그것을 위해서 그가 한 최초의 시도가 말을 바꿔 보는 것이었죠. 주변 세계의 심심함 무료함 반복적임을 괴롭게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런 시도를 하지 않겠죠. 어쨌든 이 남자는 불행하게 죽었어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는데 왤까?
가람: 자기만의 언어로 타인과 소통하지 못해서.
수환: 가장 상식적인 정답이죠. 만약 타인과 소통할 수 있었다면? 예를 들어 여러분이 이 소설을 다시 쓰기 해보겠다, 이 남자를 불행한 삶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 후편을 다시 써보겠다면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유란: 말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을 더 모아서 같이 놀다가 말을 퍼뜨려서 세계적으로.. 사람들을 늘려가서 어딜 가도 자기들만의 언어를 계속 주입을 시키고..
수환: 예를 들면 다음 카페에 ‘이런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들’ 활동을 해서 회원이 천명 만명이 되고 후원자가 생기고 작은 케이블 방송을 접수, 외계어로 방송을 하고 초등학생들이 따라 해. 어느 날 보면 부모도 하게 돼. 총선에 정치세력화를 이뤄서 정당을 이룬다.. 과연 그렇게 한다면 세계는 달라질까? 예를 들면 책상은 책상이다. 라고 사회가 규정했다. 하지만 나는 자기만의 새로운 어휘집을 갖게 되고 그걸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게 대세가 된다. 그래서 더 이상 책상을 책상이라 부르지 않고 양탄자로 부르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렇다면 이 세계가 달라질까? 그럼 좀 더 접근한 예로, 여러분들이 하자에 오면 이름을 바꾼다고 알고 있어요. 적어도 이 사회 속에서는. 왜 그렇게 하나요?
나르샤: 언니, 오빠, 교수, 선생, 계급이 나눠진 호칭을 쓰지 않게 하려고.
수환: ‘리사’ 라든지 ‘온달’ 이런 식의 이름은 스스로 짓나요? 왜 이런 이름을 짓죠?
리사: 원래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주시는데 리사, 온달, 나르샤 이런 이름은 자기가 뜻을 부여해서 난 이런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하는 거죠.
수환: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달라져요?
가람: 이 안에서는. 가람으로서.
수환: 이 사회 안에서 가람이라고 부르면 새로운 존재가 되는 건가요?
가람: 전 그렇게 생각해요.
수환: 그런 사람들이 많아서 개명을 합니다. 개명을 하면 자기가 달라지나?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는 거죠. "이름"과 "존재(사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책상을 꼭 책상이라 불러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어요. 영어로는 테이블인데. 이름이 필연적이라면 김수환 추기경과 나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어야겠지만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이름과 존재 사이에 근본적인 연결, 필연적인 연결은 없다고 봐야겠죠. 어릴 때 빨간색으로 김수환 김수환 적으면 불쾌하고 안 될 것 같고. 부도교 신자들은 누군가에게 저주를 내릴 때 그 사람 이름을 적는다든지 그 사람 모양의 인형을 불태우고 찌르고 하죠. 그러면 그 사람이 실제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고 하죠. 우리는 이름과 존재 사이에 뭔가 연결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작명소가 먹고 살고 하자에서 새로운 이름을 짓는 거죠. 이 뭔가 있다는 입장에도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존재가 먼저 있고 그것을 지칭하는 이름이 따라붙는다는 입장이 첫 번째. 두 번째 입장은 반대겠죠. 어떤 이름이나 기호가 먼저 있고 그것이 존재나 사물을 규정한다. 여러분이 하자에 와서 이름을 바꾸는 행위는 후자죠.
페르디낭 드 소쉬르라는 20세기 초반의 언어학자는 언어에 관한 여러 가지 얘기를 했지만 출발점은 바로 이겁니다. 이름과 사물 사이에 본연적인 연결이 없다. 더 나아가서 존재가 사물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이름이 존재를 결정한다고 봤어요.
소쉬르가 ‘일반언어학 강의’라는 책을 냈습니다. 죽은 뒤 3년 뒤인 1916년에 제자들이 출판한 책이에요. 결벽증이 있어서 학위논문을 제외하고는 생전에 한 권의 책도 출판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언어학 강의라는 책은 현대 언어학의 고전이며 20세기적인 인식론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책입니다. 뭐, 공시 언어학의 창시자다, 기표와 기의 개념을 말했다, 랑그와 빠롤.. 그것들을 외우는 것보다는 그 개념이 파생시킨, 우리의 상식을 깬 지점이 뭐였는지 아는 게 더 중요합니다.
기호의 “자의성”부터 시작할게요. 기호는 자의적이다. 라고 소쉬르가 말했습니다. 여기서 기호라는 것은 어느 하나의 것이 다른 하나의 것을 대신해서 표현하는 모든 것. 싸인. 언어는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기호죠.
1) 자의성
흔히 자의성을 ‘말(이름) – 사물’ 간의 관계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소쉬르가 말한 건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라는 뜻입니다. 기표는 영어로 signifier 입니다. “의미하는 것” 이란 뜻. 기의는 signified “의미 되는 것”이란 뜻입니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표는 청각영상이다라고 했어요. 청각영상은 말(이름)과 어떻게 다른가? 제가 사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귀로 사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청각영상은 어디 있어?
허브: 듣는 순간 떠올려지는..
수환: 제가 말하거나 쓰면 여러분 머리 속에는 떠올려지는 청각영상이 남습니다. 어떤 억양과 길이로 읽어도 여러분은 사과라는 동일한 청각영상으로 받아들여요. 어떻게 그렇죠? 여러분은 우리말 사과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다고 얘기하겠죠. 제가 사과를 칠판에 그려. 진짜 완전 똑같이. 그리고 아주 단순화시킨 또 다른 사과를 옆에 그려요. 하지만 여러분은 둘 다 사과로 받아들이겠죠. 왜죠?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게 감이 오나요? 소쉬르가 청각영상이라고 말한 것은 여기 적혀있는 사과라는 글자나 발음된 음성은 아니에요. 청각영상은 여러분 머리 속에 있는 거에요. ‘안녕 프란체스카’에 보면 박희진이 이 봐보야~ 하잖아요. 제 친구 중에도 그런 애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외국인이 이 봐보야~ 라고 말해도 여러분은 바보라고 알아듣죠. 하지만 예를 들어 여러분이 뉴욕 호프집에 가서 give me one veer 하면 못 알아듣죠. 우리 말에서 봐보야와 바보야는 차이가 없어요. 왜죠? 영어권에서는 V 발음과 B 발음의 차이를 감지합니다. 하지만 우리 말에는 두 발음간의 차이가 없어요.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감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봐보라고 해도 바보로 받아들이는 거에요. 사과를 다른 억양으로 읽어도 사과라는 동일한 청각영상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즉 물리적인 차이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게 공통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 청각영상 그게 ‘기표’에요.
그럼 ‘기의’는? 제가 사과라고 했을 때의 기의는? 정말 사과? 그게 상식적인 생각이죠. 사물. 하지만 소쉬르가 얘기한 건 달라요. 우리가 자유라고 하면 자유라는 기표가 떠오르지만 동시에 자유에 대한 사전적 정의도 떠오르죠. 소쉬르는 그것을 ‘개념’이라고 불렀어요.
즉 소쉬르가 말한 자의성은 청각영상과 개념 사이의 관계가 자의적이다. 라는 거에요. 기표와 기의가 결합된 것이 ‘기호’거든요? 기표와 기의는 모두 여러분의 머리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에요. 말이나 사물처럼 현실 속에 있는 게 아녀요. 소쉬르 표현을 빌면 “심리적인 실체”입니다. 머리 속, 정신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죠.
인간이 물리적인 세계를 떠나서 뭔가를 뜻하고 말하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걸리버 여행기’를 보면 어느 도시에서는 말의 폐해가 너무 커서 새로운 소통방식을 창안했는데 물건들을 끈으로 매달아 달고 다니다가 직접 보여주는 식의 소통이었어요. 불편하죠. 게다가 정의나 선, 자유 이런 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죠. 하지만 그렇게 소통했을 때 절대절명의 장점 하나가 있죠. 오해가 없어요. 그리고 거짓을 말할 수 없죠. 즉 인간이 기호를 생각하면서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생기죠. 움베르토 에코 같은 기호학자는 기호학을 거짓말에 관한 모든 것이라고 정의했어요.
기표와 기의 간의 관계는 자의적입니다. 물론 소쉬르를 떠나서, 말을 기호로, 사물을 세계로 넓혀서 생각하자면 둘 간의 관계도 자의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EBS 지식채널 보셨나요? 랑그와 빠롤에 관해 나오죠? 그것도 소쉬르의 ‘자의성’에 대한 잘못된 해석처럼, 순진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랑그를 사회, 빠롤을 개인. 흔히 이렇게 말해요. 랑그는 사회적 약속이고, 구체적인 개인들이 말을 사용하는 게 빠롤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랑그는 추상적인 것이고 빠롤은 구체적인 것이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랑그는 여러분 머리 속에 있는 규칙, 그것을 여러분이 실제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파롤이다. 소쉬르는 언어학이라는 학문이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빠롤이 아니라 랑그다. 라고 얘기했어요. 여러분 각자가 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어떤 추상적인 체계를 탐구해야 하고 그게 언어학이다.
세 번째로, “가치”. 어떤 사물 혹은 존재의 가치라는 것은 그 사물이나 존재 자체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을 가치의 의미론이라고 해요. 바로 ‘차이’입니다. 어떤 것을 어떤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체계 속에서 다른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 다른 것들과의 차이다, 라고 소쉬르는 말했어요. 이게 무슨 뜻이죠? 소쉬르는 이걸 설명하려고 체스 판 예를 들고 있습니다. 체스 안에서 각각의 말들의 가치는 어디서 오냐? 그 말들이 어느 위치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결정 됩니다. 그 말이 상아로 만들어졌냐 종이로 만들어졌냐는 중요한 게 아니죠. 우리도 장기 두다가 졸이 없어지면 바둑알 갖다가 거기에 둡니다. 그래도 지장 없어요. 장기판이라는 체계 앞에서 어느 위치에 있느냐, 너의 기능이 뭐냐, 졸은 졸의 위치와 펑션이 있어요. 졸은 왕이 아니기 때문에 졸이에요. 신호등의 빨강 노랑 초록. 하나의 체계죠. 빨간 불이 전구가 나갔어. 그래도 운전자들, 그니까 신호등 체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운전할 수 있어요. 파란 불 깜박깜박, 노란 불 깜박깜박 그 다음에 빨간 불이죠. 그걸 알면 빨간 불이 들어오지 않아도 알 수 있죠. 이런 생각은 매우 급진적인 거에요. 여러분들 각자의 가치가 본연의 존재로부터 오는 게 아니고 내가 속해있는 체계 속에서 다른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 그들과의 ‘차이’가 나의 가치를 만든다는 겁니다. 즉 개념은 순전히 차별적인 것이고, 그 본질적 내용에 의해서 적극적으로(positive)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즉 negative 하게 정의된다는 거에요. 니가 무엇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 무엇이다, 이거죠. 그래서 소쉬르는, 엄격하게 얘기하자면 언어는 차이들의 체계다. 언어에는 오직 차이들만이 있다. 고 얘기했어요. 이 말을 다르게 풀자면 어떤 것의 의미는 그 자체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속해있는 체계가 있고 그 체계 속에서 그것이 다른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온다. 라는 것이죠.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것’만 볼 게 아니라 그것이 다른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언어체계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언어가 나름의 고유한 법칙과 구조를 갖고 있다고, 소쉬르는 생각했죠. 그럼 설명해야겠죠. ‘말(기호)-사물/세계’.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이 기획한 혁명은 하나하나의 사물 이름을 바꿔보는 것이었죠. 그 사람의 생각은 다음 전제를 깔고 있어요. 언어라는 것은 이름들의 묶음이다. 어휘집이다. 라는 거죠. 그래서 그 어휘집을 새롭게 뒤죽박죽 바꿨습니다. 결정적으로 이 사람이 실패한 지점. 이 사람이 소쉬르를 읽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언어는 결코 어휘집이 아니에요. 언어는 체계입니다. 에스키모들이 눈을 지칭하는 어휘를 이십 여가지 갖고 있다는 말 들어보셨죠. 아프리카의 어느 종족은 초록색을 구분하는 어휘를 여러 개 갖고 있어요. 우리가 보는 눈과 에스키모가 보는 눈이 다를까요? 내리는 눈은 같은데. 그들은 우리와 다르게 눈이라는 같은 대상을 잘게 쪼개고 있어요. 이 쪼갠다는 말을 “분절한다”고 표현해요. 자른다. 여러분이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쪼갤 수 있다는 뜻이에요. 여러분. 시간이 뭔지 알아요? 시계는 시간을 열두 개로 쪼개놨죠. 시간 자체는 분절된 게 아니고 쭉 연결되어 있어요. 하지만 그걸 쪼개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바뀝니다. 문제는 그 쪼개는 방식이 다 같지 않다는 거에요. 에스키모가 눈을 쪼개는 방식과 우리가 눈을 쪼개는 방식이 다르잖아요? 우리는 형 동생 언니 오빠 많이 쪼개잖아요. 영어로는 brother sister 두 개뿐이죠. 말레이시아는 성차의 구분조차 없대요. 형제면 형제. 하나로. 이 말은 ‘사물-세계’가 먼저 있고 그걸 ‘말’이 수식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거죠. ‘말(기호)’이라는 것은 ‘사물(세계)’를 나름대로 분절하고 있어요. 여러분이 하자를 들어오기 전에 나름대로 분절된 단위를 살고 있었습니다. 초6년 중3년 고3년. 그건 우리나라가 그렇게 나눈 거죠. 근데 여기 들어오면 길찾기 주니어 시니어 이렇게 나누죠. 최소한 두 가지의 변화를 겪은 거에요. 이름을 새로 부여했고, 기존의 분절 시스템이 아닌 다른 분절 시스템으로 들어왔어요. 첫 번째 사안, 즉 여러분이 이름을 바꿨다는 것은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다운 발상이죠. 언어를 어휘집으로 보는 발상. 하지만 두 번째 사안은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이 생각하지 못했던 거에요. 분절의 시스템을 바꾼 거죠. 여러분 이전에, 여러분과 함께, 어떻게 하면 새로운 분절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왔던 다른 분들이 그 시스템을 만든 거죠. 만약 여러분들이 그 분절의 시스템에서도 또 벗어나고 싶다면 또다시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다르게 뜯어볼 수 있을까 생각해야겠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이름을 단순히 바꾸는 것보다 분절을 새롭게 끊어내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것. 개인이 아닌 집단의 집약된 힘이 작용해야 한다는 것.
이번엔 소쉬르가 말한 네 번째 원칙입니다. “기표”의 선형성(linearity). 기표는 선형적이다. 라는 건데. 그건 라인을 쭉 그리면서 쭉 순차적으로 간다는 뜻이에요, 기표가. 뭔 소리냐? 우리는 결코 두 가지 음을 동시에 낼 수 없다는 겁니다. 입이 하나고 발성기관이 하나기 때문에, 반드시 순차적으로만 낼 수 있습니다. 언어는 음성을 통해서 표현되고 그렇기 때문에 시간 축에 의해 순차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형성을 갖는다. 언어라는 것은 말들의 연쇄, 말들의 사슬이다. 그럼 이런 거 말고 한꺼번에 동시에 확 제시되는 경우는 불가능할까?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는 안->녕->하->세->요 하고 붙여가는 방식으로 쓰고 읽죠. 그럼 이런 거 말고 각각의 구성성분이 한꺼번에 몽창 제시되는 경우는 없나? 시간 축 상에서 제시되는 게 아니라 공간 축 상에서 제시되는 거. 그림이 그렇죠. 해, 산, 사람이 있는 그림을 볼 때 해->산->그림 순서로 보나요? 동시적으로 제시되죠. 즉 소쉬르가 선형적인 기표라고 말할 때는 그림, 이미지는 제외되는 표현인 거죠.
이쯤에서 정리해봅시다.
- 언어의 자의성.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가 자의적이다.
- 랑그와 빠롤. 랑그는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추상적 체계. 빠롤은 그것을 실제의 개별화자가 사용하는 구체적 용례들.
- 차이. 차이를 통한 의미. 가치라는 것은 그 대상이 속해있는 체계 속에서 다른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 정확하게는 ‘차이’에 의해서 가치를 만든다.
- 기표의 선형성. 언어는 시간 축 상에서 순차적으로 사슬을 만들며 진행된다.
가람이가 / 하자 인문학 강의에 / 간다 /
그럼, /가람이/ 대신에 이 수직축에 올 수 있는 것들이 있죠. 다른 사람들 이름 다 쓸 수 있죠. /하자 인문학 강의에/ 대신에도 다른 게 올 수 있죠. 작업장에, 집에.. /간다/ 대신에도, 빠진다, 온다, 가고 있다..
내가 ‘가람이가’ 라고 말할 때는 그 밑에 다른 단어들이 좍 깔려있어요. 3D 애니메이션 느낌을 떠올려보세요. 그 많은 단어들 중에 ‘가람이’를 위로 불쑥 선택한 거죠. 다른 단어들도 마찬가지. 그렇게 올라온 것들이 서로서로 이어져서 ‘결합’이 됩니다. 그 과정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 두 가지 프로세스를 하고 있는 거죠. ‘선택’과 ‘결합’. 선택하고, 결합하고, 선택하고, 결합하고.. 그러면 그게 말이 됩니다. 문장이 돼요. 선택이 이루어지고 있는 세로축, 수직축을 소쉬르는 ‘계열축’이라고 부릅니다. 선택된 것들이 서로서로 결합하고 있는 수평축을 소쉬르는 ‘통합축’이라고 부릅니다. 즉 언어는 계열축과 통합축 사이에서 선택과 결합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계열축에 있는 많은 요소들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서로 ‘대체’될 수 있는 관계에 있어요. 한편 통합축 상의 요소들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관계에 있어요.
인간의 언어는 이런 구조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계열축 상에서 서로서로 대체될 수 있는 관계, 등가를 이루고 있는 것들과 관계가 있고. 통합축 상에서 서로서로 연결될 수 있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어요. 아무거나 연결될 수는 없어요. 문법에 의해 맞는 것이 있죠. 예를 들어 어느 어린아이가 인식은 다 하는데 말을 못해요. 엄마가 말을 가르칩니다. 연필. 연필을 보여주면서 “이게 뭐야?” 물어봐요. 애는 연필이란 단어를 모르지만 내가 그걸 알고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어. 그럼 다른 사물을 기호로 사용해서 내가 연필을 안다는 걸 표현하려 한다. 그럼 볼펜을 집어서 그걸 들이대. 그럼 볼펜과 연필이 등가의 관계라는 걸 표현한 거죠. 그럼 또 다른 경우 뭘 보여줄 수 있을까? 종이? 그렇죠. 종이는 통합축 상에서 결합되고 연결될 수 있는 관계죠. 우리가 뭐, 프로이트를 읽지 않았더라도. 암튼 꿈에서 욕망이 너무 직접적으로 나타나면 놀랍니다. 꿈에서도 검열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꿈에서는 다른 사물로 대체해야겠죠. 누군가를 사랑해. 이건 금지된 사랑이야. 근데 욕망이 있어서 꿈에 나타납니다. 지금 정말 유치한 수준으로 얘기하고 있어서 프로이트에게 미안한데, 암튼 그 욕망은 어떤 식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겠죠. 정말 유치한 수준으로 흔히 그런 얘기 하잖아요? 딱딱하고 긴 게 나오면 무조건 남근이다. 만약 그런 게 나오면? 그건 ‘대체’ 관계죠. 남근과 딱딱하고 긴 물체 사이에는 대체 관계가 있죠. 더 정확하게는 ‘유사’ 관계. 꿈에 유독 계속 빨간 색이 나온다. 예를 들면 사막에서. 방에 들어가도 빨간 색. 밖에 나와도 빨간 색. 계속. 그럼 그건 뭘까? 알고 보니 그 여자가 빨간 색 외투를 입고 다녔다. 그 여자가 있을 땐 항상 빨간색이라는, 그 여자와 결합된 빨간색이 떠오른다. 이건 통합축 상에서의 일이죠.
로만 야콥슨이라는 러시아 출신의 언어학자가 있어요. 그 사람이 소쉬르의 개념을 가져다가 ‘선택축’과 ‘결합축’ 이라고 이름을 바꿔 불렀어요. 이 사람이 실어증 연구를 했는데, 흥미롭게도 두 가지 유형으로 갈리더라는 거죠. 하나는 선택축이 맛이 가는 경우, 둘은 결합축이 망가지는 경우. 둘 다 망가지는 경우는 없더라는 거죠. 선택축이 망가지고 결합축이 작동하는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 이 사람은 선택을 못해, 단어를 꺼내지를 못해, 하지만 연결은 시켜. 그러면 말의 형태는?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처럼 되겠죠. 문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어요. 근데 이 사람의 증상은 말을 시작을 못해요. 하지만 어떤 사람이 말을 하면 연결해서 응답하는 건 잘하죠. 뜻이 전혀 통하지 않은,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말하겠죠. 그럼 선택축은 괜찮은데 결합축이 망가진 사람들은? 흔히 얘기하는 일분 발화. 단어 하나로만 말하거나 단어들만 죽죽죽죽. 주로 애들. 혹은 남대문 시장 아저씨들이 영어를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결합규칙에 해당하는 문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죠.
소쉬르의 언어 매카니즘은 단순히 언어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고하는 체계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죠. 예를 들어..
(파워포인트 프리젠테이션으로 수직축과 수평축 사고체계로 풀어낼 수 있는 지면 광고 등을 살펴봄. (윽. 제 컴퓨터에 그 파워포인트가 있어서 적지 못했어요. 죄송..)
SK 광고 중에 ‘여보세요’에 해당하는 각국의 단어들을 죽죽 나열한 게 있었죠. 그 CF는 ‘여보세요’와 대체할 수 있는 유사관계에 있는 단어들을 죽 결합해서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죠. 결합의 원리는? 순서대로 나열되는 인종들. 제가 수업 후 몇 가지 예들을 블로그에 올릴게요. 여러분들도 직접 이런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계열축에서 선택/대체될 수 있는 항들의 목록은 소쉬르의 표현을 빌자면, “부재 속에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아, 깔려있는 가능성. 근데 그 중 어느 하나가 선택이 되면 위로 탁 올라오는 거죠. 그것이 통합축 속에서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이것도 소쉬르의 표현에 따르면, “현존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원리는 단순히 언어의 매카니즘 뿐 아니라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서 사고하는 방식 자체, 의미가 결정되는 과정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시장에 내놓을 때 그 제품이 이 시장에 어느 정도 위치에 들어갈 수 있는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걸 positioning이라고 하죠. 시장조사를 먼저 하는데, 어떤 팀에서 제안한 게 이런 게 있었어요. 마트에 가서 어떤 사람이 우리 제품과 동일한 가격대 라인에 있는 제품을 집으면 그 사람을 계속 쫓아다녀요. 그 사람이 다른 제품군에서는 뭘 고르는지를 보는 겁니다. 그걸 죽 연결하면 그 사람의 소비패턴이 하나의 문장으로 나오겠죠. 이 사람은 선택을 하면서 결합을 하는, 그 과정을 거쳤던 겁니다. 그럼 그 결론과 잘 결합할 수 있는 아이스크림을 내놓으면? 그것을 고르겠죠. 그런 기획안을 내놨다가 아이디어는 참신하나 실행하기 어렵다는 평가 얻은 적 있어요. (웃음)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는 이야깁니다.
의미라는 것이 어디에 귀속되는가? 전통적인 입장은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어요. 첫 번째는 재현적 입장 혹은 접근. 영어로는 representational approach. “사람”이 “기호체계”를 사용해서 “세계”를 말할 때, 재현적 입장이란, 의미라는 것은 “세계”에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 “세계”를 이 “기호”가 재현하고 있다고 보는 거죠.
두 번째 접근은 의미가 이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기호”를 이용해서 표현하는 “나”, “사람”에게 있다. 그걸 의도적 접근. 이라고 합니다. intentional approach.
그렇다면 소쉬르의 입장은? 의미는 “세계”에도 “사람”에게도 없고 “기호”에 있다고 봅니다. 이걸 구조주의적, 구성주의적 접근이라고 합니다. 결국 “기호”가 “세계”를 구성하고 “인간”을 구성한다는 소립니다. 이것이 구조주의적, 구성주의적 접근의 인식론입니다. 우리가 의미를 이해할 때, 근본적인 것은 체계 속에서 각각의 요소들이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 즉 그 관계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호세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계”, “여러분 자신”까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내가 바뀌어야 세계가 바뀐다, 세계가 바뀌어야 내가 바뀐다, 소쉬르에 의하면 둘 다 아니에요. 기호를 바꾸어야 한다. 세계에 대한 재현을 바꾸어야 한다. 어떻게? “기호체계”라는 건 세계를 이해하고 분절하는 방식입니다. 그게 바뀌어야 하는 거죠. 여러분이 하자에 와서 바뀌었다, 혹은 바꾸려고 하는 많은 것들이 있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내”가 바뀌면? 바뀌는 게 있고 바꿀 수 없는 게 있죠. 그럼 안 되는 건 왜 안 되는가? 만약 “기호”가 없이 “세계”와 “인간”만 있다면 세상만물이 훨씬 간단하겠지만, 둘 사이에는 “기호”라는 엄청난 제 3항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건 사회적인 약속, 규칙일 수 있어요. 그건 막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자의성이라고 소쉬르가 표현했던 언어의 속성이라는 것은, 언어는 태어날 때 그니까 선천적으로는 자의적이지만 후천적으로는 자의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언어 그 자체는, 다시 말해 사회적 약속 자체는 자의적이다. 하지만 구성원들 개개인한테 그 약속은? 강제로 다가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자의적인 거에요. 절대절명의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상황, 여건, 의지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요.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결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느끼기에는, 사회가 부과하는 강제적인 규율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어떻게 대응하면서 살아가는가? 우리가 생각해볼 문제겠죠. 제가 생각했을 때 우리는 각자 줄타기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사회가 부여한 규칙, convention, 관례를 타고 따라가요. 그러지 않으면 떨어지거나 고립되거나 심한 경우엔 감금됩니다.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조금씩 일탈을 하죠. 그 상황에서 자기의 창조적인 자의성을 표현하려 합니다. 줄타기. 그 줄타기는 모종의 집단적인 성격, 제도적인 성격을 띨 수도 있습니다.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이 실패한 지점일 수도 있고 우리가 더 나아가야 할 지점일 수도 있겠죠.
우리는, 이제부터는, 내가 어떤 것에 대해서 ‘이건 이거야’, ‘저건 저거여야만 해’, 하기 전에 물어야만 할 것이 있겠죠. 이게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가? 이게 기호세계 속에서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단순히 바라만 보는 게 아니라, 그 내부에서 의미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분절돼서 어떤 관계들 속에서 구축되어 있는가? 그걸 분석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 분절의 지점들을 조금이라도 다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람이 하자에 갔다”는 문장의 빈틈을 조금이라도 파고들어 비틀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혁명입니다. 그 구조를 냉철하게 분석할 수 있어야, 여러분에게 부여되어 있는 사회적 convention을 조금이라도 새롭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 신청서를 읽어보니, 나의 말, 나의 언어로 말하고 싶다는 분이 꽤 있었는데, 그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건 나만의 어휘집을 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건 나만의 어휘집이 아니라 나만의 의미생성 법칙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훨씬 더 어렵고 지난하며 분석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작업입니다.
오늘 우리가 얘기한 것은 전적으로 언어, 인간의 말에 관한 얘기였습니다. 소쉬르는 언어학자였으니깐. 그래서 언어 이외의 것들을 배제했어요. 다음 시간에는 그 배제된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할 겁니다. 이미지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표현되는가? 그건 소쉬르가 이야기한 것과 다를 수도, 같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지 이야기를 하기 전에 소쉬르의 중요한, 절대적인 한걸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기호 중에 언어는 가장 중요하며 대표적인 것이다. 소쉬르는 “우두머리”라는 표현을 썼는데. 하여간 다음시간에는 이미지에 좀 더 집중하겠고, 그 중에서도 사진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숙제)
통합축과 계열축 상의 원리를 통해서 의미가 구축되는 예들을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자.
선택과 결합이라는 원리를 사용해서, ‘어떤 대상의 의미가 이렇게 구축됐다’ 를 설명해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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